마음의 소리를 듣는 감정 다루기 연습
정신의학신문 ㅣ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일러스트_freepik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크고 작은 감정의 파도 속을 지나갑니다. 출근길에 마주한 교통체증 속에서 답답함을 느끼고, 회의 중에 동료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서운함이 올라오기도 하죠. 누군가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다가, 문득 떠오른 과거의 기억에 울컥해지기도 합니다. 이처럼 감정은 우리 삶의 모든 장면에 스며들어 있고, 그 흐름은 늘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채 지나치곤 합니다. “괜히 예민하게 굴지 말자”, “지금 화낼 상황은 아니지”, “기분이 왜 이런지 모르겠지만 그냥 넘기자” 하고 감정을 밀어내거나 억누르는 일이 많지요. 그러나 감정은 억누른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제대로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때론 몸의 증상으로, 관계의 갈등으로, 또는 설명하기 힘든 무기력과 우울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가 감정과 더 잘 지내기 위해 쓸 수 있는 접근이 바로 ‘정서 중심 치료(EFT, Emotion-Focused Therapy)’입니다. EFT는 심리치료의 한 방법이지만, 그 핵심 원리는 우리가 일상에서 감정 다루기의 기술로 활용하고 실천해 볼 수 있습니다.
EFT는 캐나다의 심리학자 레슬리 그린버그(Leslie Greenberg)에 의해 발전된 접근으로, ‘감정은 문제가 아니라 변화의 열쇠’라는 전제를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분노, 슬픔, 수치심 같은 감정들조차도, 그 안에는 우리 마음이 필요로 하는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억울함은 나의 경계가 침해되었음을 알려주는 감정이고, 외로움은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 내면의 욕구를 비추는 감정입니다.
EFT는 감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일차 감정(primary emotion)과 이차 감정(secondary emotion)이 바로 그것인데요. 일차 감정은 특정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본래의 감정으로, 그 감정이 우리에게 어떤 중요한 욕구나 필요를 알려주는 신호 역할을 합니다. 반면, 이차 감정은 이러한 일차 감정을 억누르거나 회피하거나 반응하면서 생기는 감정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상처받아 슬픈 마음이 올라왔는데, 그 슬픔을 드러내는 게 부끄럽고 두려워서 대신 화를 내는 경우, 그 ‘화’는 이차 감정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문제는 이차 감정이 일차 감정을 덮어버릴 때, 우리는 정작 중요한 내 마음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화가 났을 때, 그 아래에 어떤 감정이 숨겨져 있었는지를 천천히 들여다보는 작업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EFT에서는 바로 이 ‘감정 아래의 감정’을 탐색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이를 통해 내면의 진짜 욕구를 찾아가는 것을 돕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일상에서 이런 감정 인식과 표현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1.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이는 태도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감정을 ‘고치거나 없애야 할 문제’로 보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느껴볼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이 감정은 틀렸어”, “이렇게 느끼면 안 돼”라고 판단하는 대신, “아, 내가 지금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구나” 하고 마음속에서 조용히 인정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정은 훨씬 수그러들 수 있습니다.
2. 감정에 이름 붙이기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할 때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럴 때 ‘짜증’, ‘화남’, ‘답답함’ 같은 익숙한 말보다 조금 더 세밀한 감정 어휘를 써보는 연습이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섭섭함’, ‘서운함’, ‘무시당한 느낌’, ‘초라함’, ‘부끄러움’, ‘안도감’ 같은 단어들은 감정을 훨씬 더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해줍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일은 곧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중요한 첫걸음입니다.
3. 감정 속에 담긴 의미를 탐색하기
세 번째는, 감정에 따라 바로 행동으로 옮기기보다는, 그 감정 속에 담긴 의미를 잠시 들여다보는 여유를 가지는 것입니다. “지금 이 감정은 나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지?”, “내가 지금 진짜로 원하는 건 무엇이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죠. 그러면 감정에 휘둘리는 대신, 감정과 함께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일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온 사람일수록, 처음에는 ‘무엇을 느끼는지조차 모르겠다’라고 혼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천천히 감정의 문을 열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전문가는 안전하고 지지적인 환경 속에서, 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함께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감정을 느끼거나 표현하는 것은 나약함의 표시가 아닙니다. 오히려 감정을 정확히 느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은, 자기 마음의 흐름을 읽고 다룰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결국,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더 따뜻하고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지요.
감정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마음이 흘러가는 길을 억지로 막기보다 그 흐름을 따라 함께 걸어보기로 용기를 내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 그 길 위에 서 있는 존재이며, 감정은 늘 우리 안에서 길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면 좋겠습니다.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전형진 원장